2025. 4. 19. 11:56ㆍ문학
시인은 오로지 시만을 생각하고
정치가는 오로지 정치만을 생각하고
경제인은 오로지 경제만을 생각하고
근로자는 오로지 노동만을 생각하고
법관은 오로지 법만을 생각하고
군인은 오로지 전쟁만을 생각하고
기사는 오로지 공장만을 생각하고
농민은 오로지 농사만을 생각하고
관리는 오로지 관청만을 생각하고
학자는 오로지 학문만을 생각한다면
이 세상이 낙원이 될 것 같지만 사실은
시와 정치의 사이
정치와 경제의 사이
경제와 노동의 사이
노동과 법의 사이
법과 전쟁의 사이
전쟁과 공장의 사이
공장과 농사의 사이
농사와 관청의 사이
관청과 학문의 사이를
생각하는 사람이 없으면 다만
휴지와
권력과
돈과
착취와
형무소와
폐허와
공해와
농약과
억압과
통계가
남을 뿐이다
대학은 원래 생각을 키우는 곳이다.
그런데 요즘 대학을 보면, 생각이 키우기는커녕 콩나물처럼 빽빽하게 찔려 자란다.
물을 주는 게 아니라 서류를 주고, 햇빛을 쬐는 게 아니라 직인을 쬔다.
이러다 생각이 아니라 결재라인이 무럭무럭 자라겠다.
김광규 시인은 말했다.
"생각과 생각 사이에는 틈이 없다."
우리 대학본부도 진작 깨달은 모양이다.
회의와 보고 사이, 보고와 재보고 사이, 재보고와 검토요청 사이에
틈을 허락하지 않는 초일류 압축관리 시스템을 갖췄다.
학과장이 제안서를 들고 찾아오면,
총무팀은 묻는다.
"혹시 이전에 유사한 사례가 있었나요?"
기획처는 추가로 묻는다.
"전례가 없으면 안 됩니다. 전례가 있으면, 왜 똑같은 걸 또 하냐고 묻겠습니다."
결국 어떤 제안도 '너는 전례가 없어서 탈락' 아니면 '너는 전례가 있어서 탈락'으로 깔끔하게 처리된다.
완벽하다. 숨 쉴 틈이 없다.
심지어, 어느 대학은 "혁신을 하라"고 지시했는데,
직원들은 머리를 맞대고 혁신적으로 회의를 했다.
회의 결과?
"회의할 때 커피를 한 잔 덜 마시자."
회의의 혁신은 회의비 절감으로 귀결되었고, 모두들 혁신의 감격에 눈물을 삼켰다.
학생들은 요즘 캠퍼스에서 '혁신'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움찔한다.
혁신의 끝은 항상
- 매뉴얼 추가,
- 규정 강화,
- 보고서 양식 변경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심지어 동아리방 청소도 '청소기 운영 규정 제정안'을 거쳐야 가능하다.
대학본부의 신조는 단 하나,
"아무 일도 없게, 모든 일을 하자."
이쯤 되면 대학이 아니라 '틀에 끼우기 전문회사' 같다.
모든 생각은 규정 틀에 들어가야 하고,
들어가지 않는 생각은 "개인 의견입니다" 딱지를 붙여 버린다.
이런 대학에 남은 건 뭘까?
조용하고, 깨끗하고, 아무 일 없는 캠퍼스.
생각 없는 평화.
아무도 사고치지 않는 완벽한 질서.
그리고 뻣뻣한 경직.
한마디로, '숨 쉬지 않는 대학.'
학생들은 오늘도 묻는다.
"여긴 도대체 왜 이렇게 답답할까?"
답은 간단하다.
"생각과 생각 사이에 숨 쉴 틈을 안 줬거든."
이제 제안해본다.
회의와 회의 사이에 ‘멍 때리기 시간’을 넣자.
보고서와 보고서 사이에 ‘헛소리 한 줄’ 넣기 의무화하자.
규정과 규정 사이에 ‘뭐 그냥 하자’ 구멍을 뚫자.
대학이여, 제발 틈을 좀 주자.
틈이 있어야 생각도 숨 쉬고, 사람도 웃는다.
틈이 있어야 살아있는 거다.
지금처럼 빡빡하게 조이면, 언젠가 정말 큰 소리로 터질지도 모른다.
"대학, 그거 아직도 숨 안 쉬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