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파스칼 – ‘마음의 이유’

서호60 2025. 6. 13. 10:39

현대 기독교 관점에서 바라본 파스칼 – ‘마음의 이유’가 오늘 우리에게 묻는 것

프랑스 오베르뉴 지방의 포구(浦口) 같은 도시 클레르몽페랑에서 태어난 블레즈 파스칼은 올해로 서거 363주년을 맞았지만, 그의 숨결은 여전히 뜨겁다. 2023 년 6 월 교황 프란치스코는 탄생 400주년을 기념해 사도적 서한 Sublimitas et Miseria Hominis (“인간의 위대와 비참”)을 공표했고, 그 안에서 파스칼을 “과학과 신앙, 가난한 이웃을 결합시킨 빛나는 정신”으로 호명했다.(vatican.va) 같은 해 스위스 베른에서는 물리학·신학·철학자들이 한데 모여 ‘파스칼 400 심포지엄’을 열어 “과학·신앙·윤리의 대화 모델”을 주제로 토론했다.(scnat.ch) 17 세기 진공 실험실과 21 세기 데이터센터 사이를 종횡무진으로 연결하는 이 사상가는,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가.


1. ‘생각하는 갈대’—비참과 위대의 패러독스

『팡세』에서 파스칼은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 부르며, “왕위에서 쫓겨난 폐위(廢位)의 왕”에 비유했다. 갈대처럼 부러지기 쉬운 존재이지만, “우주를 관조할 수 있는 사유” 때문에 위대하다는 역설이다. 여기서 그는 인간의 존엄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타락한 현주소를 직시한다. 교회는 종종 ‘하나님의 형상’만을, 세상은 ‘진화적 충동’만을 강조해 균형을 잃는다. 파스칼의 패러독스적 시선은 두 극단을 동시에 붙잡는다. 교황청 서한의 제목이 “위대와 비참”인 것도, 인간학이 복음의 첫 단추임을 새삼 일깨운다.(vatican.va)


2. ‘마음의 이유’—이성과 신앙 사이의 다리

파스칼은 “마음은 이성이 알지 못하는 이유를 안다”고 썼다. 이 문장은 두 방식의 인식—계량적 증명과 실존적 직관—을 화해시키는 다리가 된다. 현대 한국 교회도 과학 논쟁 앞에서 두려움과 방어본능으로 후퇴하거나, 반대로 ‘영혼 없는 이성’에 투항하는 모습을 보인다. 파스칼은 그 어느 쪽도 택하지 않았다. 압력 단위 Pa가 그의 이름을 딴 것은 실험과 수학의 정밀함 덕분이지만, “불(Feu)의 밤”이라 불린 1654년 회심체험에서 그는 이성의 한계를 뚜렷이 느꼈다. “아브라함·이삭·야곱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은 관념이 아니라 만남이었다. 우리는 데이터와 경험, 공식과 기도가 충돌하지 않는 사유 형태를 파스칼에게서 배운다.


3. ‘내기’와 불확실성—신앙의 실용적 차원

『팡세』의 유명한 ‘내기(Wager)’는 신 존재를 결정하지 못하는 이에게 “무한의 상(賞)과 유한의 손실”을 저울에 올린다. 매 순간 투자·보험·기후 정책이 ‘낮은 확률 × 막대한 손실’ 계산 위에서 결정되는 21 세기에도 그 논법은 유효하다. AI 안전 연구자들이 “파국적 손실 앞에서 낮은 확률이라도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 때 ‘파스칼의 머깅(Pascal’s Mugging)’이라는 이름을 빌리는 것만 봐도 그렇다.(youtube.com, forum.effectivealtruism.org) 내기는 단순한 확률 놀음이 아니라 “리스크를 직면하는 존재”로서 인간이 지녀야 할 영적 실용주의다. 서비스업과 스타트업, 정책 현장에서 ‘파스칼적 사고실험’이 다시 읽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4. 디베르시스망(divertissement)과 스마트폰 중독

파스칼은 “인간의 모든 불행은 방 안에 홀로 머물지 못함에서 비롯된다”고 탄식하며, 사교·도박·소란을 ‘딴짓(디베르시스망)’이라 불렀다.(thegospelcoalition.org, anthologialitt.com) 오늘 우리는 호주머니 속 스마트폰과 24시간 알림으로 한층 세련된 ‘딴짓 기계’를 들고 다닌다. 기독교 영성 전통의 ‘침묵 기도’ ‘안식일’ ‘렉시오 디비나(성경 묵상)’는 파스칼이 예견한 “거룩한 고독”을 회복하는 훈련장이다. 청년 사역 현장에서는 ‘디지털 금식 주간’이 하나의 영적 실험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파스칼의 통찰이 보다 풍성한 신학적 근거를 제공한다.


5. 과학·기술·신앙의 통전

2023년 베른 심포지엄에 참석한 물리학자들은 “파스칼은 진공을 증명한 과학자이자 ‘진공(空)을 메우는’ 신앙의 사상가였다”고 평가했다.(scnat.ch) 그의 발명품 ‘파스칼린’은 현대 컴퓨터의 먼 조상이 되었고, 확률이론은 경제와 통계, 리스크 관리 학문을 가능케 했다. 이런 업적은 교회가 과학기술을 경계하기보다 ‘창조 질서 읽기’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근거를 확장한다. AI 윤리·기후 과학·바이오테크 같은 첨단 영역에서 “마음의 이유”가 요구하는 것은, 기술을 향한 성육신적 시선이다. 파스칼은 과학적 엄밀성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하나님 탐구”라는 더 큰 지평 속에 배치했다.


6. 가난한 이웃을 향한 지성의 손길

말년에 파스칼은 ‘포어 빈민원’을 운영하며 수익금을 대부분 가난한 이웃에게 돌렸다. 교황청 서한은 이를 두고 “지성이 곧 사랑이어야 한다”는 파스칼의 사회적 영성을 강조했다.(osvcatholicbookstore.com) 한국 교회 역시 ‘지식인 교회’ 혹은 ‘영성 공동체’라는 두 얼굴을 파편화하지 않고, 지성과 선행의 통합을 추구해야 한다. 파스칼에게 학문·기도·구제는 서로를 보증하는 삼각형이었다.


7. 우리 시대를 향한 세 가지 메모

첫째, 심정의 변증. 기독교 변증은 논리적 승부가 아니라, ‘마음의 이유’를 건드리는 공감적 대화여야 한다. 고대 변증가 터툴리안이 “영혼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안다”고 말했듯, 파스칼은 이 ‘원형 기억’을 사랑과 눈물로 깨웠다.

둘째, 디지털 금식과 공동체 재구축. 딴짓의 시대를 살피며 파스칼은 독려한다. “족쇄를 끊고 방 안에 머물라.” 침묵, 모임, 성찬이라는 고대적 리듬으로 디지털 소음을 걸러내는 실험이 교회 안에서 더 자주 시도돼야 한다.

셋째, 리스크 인식과 공적 신앙. 팬데믹, 기후변화, AI 위기처럼 ‘낮은 확률 × 큰 손실’이 일상이 된 시대에, 파스칼의 내기 논법은 윤리·정책 토론의 핵심 도구다. 교회는 “영혼 구원”을 넘어 “세대 구원”으로 시야를 넓혀야 한다.


맺음말—무한과 무(無) 사이의 선택

파스칼은 “무(無)와 무한 사이에 선 인간”을 응시했다. 그는 과학의 실험실에서 ‘진공’을, 기도의 새벽에 ‘불’을 만났고, 두 세계를 하나의 호흡으로 엮어 냈다. 우리도 데이터와 어플리케이션, 예배당과 거리 시위 사이에서 ‘마음의 이유’를 회복해야 한다. 파스칼이 던진 마지막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당신은 어느 편에 당신의 삶을 걸 것인가?” 끊임없이 흔들리는 갈대일지라도, 생각하고—더 나아가 기도하는—갈대라면,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또 한 번 위대와 비참을 화해시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