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벚꽃 아래, 성곽은 무너지고—두보 「춘망(春望)」로 바라본 2024-25년 한국

서호60 2025. 5. 15. 19:21

벚꽃 아래, 성곽은 무너지고—두보 「춘망(春望)」로 바라본 2024-25년 한국

國破山河在
나라가 무너졌으나 산천은 그대로였고
城春草木深
봄이 찾아든 성 안엔 풀만 무성하더라.

벚꽃이 도로 위에 핑크빛 비를 뿌리던 2024년 12월 3일 밤, 우리는 TV를 통해 “계엄”이란 낡은 단어를 다시 들었다. 대통령은 국회와 언론의 기능을 잠시 멈추겠다 선언했고, 탱크 대신 헌법이 떨렸다. 불과 두 시간 반 만에 국회는 해제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지만, 그 짧은 사이에도 사람들은 시대가 거꾸로 흐르는 소리를 들었다. 두보가 난리 속 장안에서 무너진 성을 바라보며 읊조렸던 첫 두 구절이, 천 년의 먼지를 털고 그대로 입안에 맴돌았다. 

그리고 2025년 4월 4일, 헌법재판소는 같은 대통령을 전원일치로 파면했다. 재판장은 “경고용 계엄”이란 말을 단호히 부정하며, 권력이 헌법 위에 설 수 없음을 새겼다. 환호와 비탄이 광장을 뒤섞는 사이, 시인의 다음 후렴이 떠오른다.

感時花濺淚
때를 슬퍼해 꽃 앞에서도 눈물이 흐르고
恨別鳥驚心
이별을 한탄해 새소리에도 가슴이 덜컹거린다.

벚꽃 아래 우리는 또 울었다. 꽃은 그대로인데, 계엄이냐 탄핵이냐를 오가는 120여 일의 소용돌이 속에서 ‘국가란 무엇인가’ ‘헌정이란 무엇인가’ 끝없이 자문해야 했기 때문이다. 


잔해 위에 돋은 봄

난리는 총칼만으로 오지 않는다. 오늘 우리의 전쟁터는 국회 본회의장, SNS 뉴스피드, 그리고 가족 단톡방 속이다. 양편으로 갈라선 말들이 화살이 되어, 사소한 대화까지도 결투가 된다. 두보가 “초목만 무성”하다고 했던 폐허는, 이제 디지털 댓글 속에 활자를 틔운다. 균열 난 공동체를 덮어버린 이다.

그러나 풀은 생명이다. 무너진 성벽 사이를 메우며, 언젠가 다시 길이 되리라는 희망도 품고 있다. 광장에서 ‘헌법 수호’를 외친 시민들의 촛불, 군사화를 막아낸 국회의 해제 결의, 그리고 탄핵 심판을 지켜본 국민의 눈빛—이것이 오늘의 초목이다.

백발을 긁으며 묻는 질문

白頭搔更短,渾欲不勝簪
흰 머리를 긁자 더 짧아져 비녀조차 꽂기 힘들다.

두보가 탄식한 노년의 상징은, 요즘으로 치면 ‘탈진한 중년’ 혹은 ‘현타 온 청년’일지 모른다. 공적 시스템이 무너지면 개인은 분노하다 지치고, 투표와 시위를 반복하며 고개 숙인다. 이때 시인은 우리에게 한 가지를 남긴다—“그래도 쓰라”고.

장안이 불타던 해, 두보는 가족과 흩어진 채 서신과 시를 남겼다. 그것이 후대에 그의 시대를 증언했듯, 오늘 우리는 짧은 글 한 줄, 현장 사진 한 장으로 기록을 남긴다. 헌정이 흔들린 봄, 민주주의를 지켜낸 여름, 파면과 보궐을 앞둔 가을—모두 누군가의 노트와 카메라에 저장되어야만 기억이 된다. 그래야만 다음 풀과 꽃이 돋을 자리에서,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는다.

남은 구절—그리고 우리의 숙제

國破山河在
성은 무너졌어도 산천은 남는다.

헌정도, 제도도, 성벽과 같다. 한 번 무너지면 오래 복구가 걸린다. 그러나 “산하”—국민의 삶과 자연의 질서는 남는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벚꽃이 떨어진 자리마다 씨앗을 심는 것이다. 서로 다른 진영이라도 토양은 공유한다. 그 토양을 황폐화시키지 않는 법, 그 법은 이미 시인의 손에 적혀 있다.


무너진 성 위에서 맞은 또 한 해의 봄. 꽃은 다시 필 것이나, 그 밑돌이 푸르게 남느냐, 회색 콘크리트로 갈라지느냐는 모두 우리에게 달렸다. 난리를 흘려보내고도 산천을 지켜낸 시인의 충혈된 눈빛을 떠올리며, 오늘도 묻는다.

“나라가 무너져도, 당신의 봄은 살아 있습니까?”